성명 : 김 승 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생년월일 : 1950년
6월 24일
상기 본인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이 소개서를 씁니다.
지난 1994년 창립이래로 선배 과학기술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국제적인 학술할동을 주최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기술에 관련된 정책조언과 제안을 통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대표적인 엘리트 과학기술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80억이 넘는 예산으로 Nobel Prize Dialogue,
IASSF(InterAcademy Seoul Science Forum)등의 국제회의와 한림원탁토론회,
한림학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6년부터 한림원 기획정책 담당 부원장 일을 보면서
한림원탁토론회, 한림정책연구 등에 관련하였고 지난해부터는 한림원 정책연구소장도 겸임하면서 Nobel Prize Dialogue의 조직위원장으로써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2년여의 부원장 업무를 보면서 바라본 한림원은 현재까지의
발전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개선해야할 점들도 눈에 띄어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 보자는 생각에 감히 차기원장 선거에 나서게 되었으며
원장후보로써의 제 이력을 말씀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다음의 좀 긴 글을 써 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의 연구활동
본인은 1973년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만들고
미사일 개발을 계획하면서 과학장교라는 공채 과정을 통해 훈련을 마치고 장교 임관 후 ADD에서 연구개발
업무에 종사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운 좋게도 여기에 합격하여
5개월의 공군장교 훈련, 그리고 공군 67기로써
임관 후 6개월 대구 동촌 비행장 현지 복무 후에 서울에 있던 ADD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공포 훈련용 표적기(Target Drone, 드론이
요즈음 나타난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드론의 역사는 이와 같이 오래되었습니다)를 역설계하는
작업에 참가했다가 1년 후부터는 풍동시험 분야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이키 미사일을 모방한 NHK(후에 백곰으로 명명됨)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풍동시험실에서는 개발 중인 미사일들의 최적형상을 찾아내기 위해 축소형 모형을 만들어 각종 공기역학적 특성을 시험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사일의 대부분 비행 경로 속도가 초음속이라 그 특성시험도 초음속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주 고가의 3중 음속 풍동시험시설을 외국기술로
건설하고 있었고 우리 연구원들은 시험실설치, 시험 운용기법 등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3중 음속 풍동은 그 당시로는
초대형 최신식의 자동화된 시설로서 전용 중형컴퓨터가 달려 있었고 풍속이나 받음각등도 자동 조절되면서 아음속, 천음속, 그리고 마하수 4.5까지 시험이 가능한 73년 당시 가격으로 700만 달러 이상의 초고가의 시험시설이었습니다. 이 풍동의 운영을 배우기 위해 75년과 76년에는 풍동을 설계한 FluiDyne사가 있는 미네소타 방문과
같은 기능의 풍동을 보유한 댈러스의 Vought Aerospace사로 연수를 가서 새로운 운용기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본인은 모두 수입 구매해서 쓰고 있는 초음속 풍동용 6분력 측정장치인 밸런스를 국산화한다고 열심히 뛰어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본인이 설계 개발한 밸런스와 미사일의 풍동 모형 사진이며 당시의 국산화 노력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ADD 풍동시험실은 세계적인 수준의 시설과 장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림 1. 개발된 미사일 풍동 모형과 6분력 밸런스 측정기
현재까지 ADD는 우리 군이 필요로 하는 지대지, 지대공, 대함, 대잠, 순항미사일 등의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각종 국방용 미사일 들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왔고 풍동시험
시설이 연구개발을 뒷받침해왔습니다. 이들 ADD가 개발한
미사일들은 유사시 즛시 발사가 가능해야 해서 주로 고체연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장거리 미사일은
우리의 국방정책 상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견제에 의해 연구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가 우주발사체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민간 우주기술 개발
차원에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1999년부터 더 큰 추력을 낼 수 있는 액체로켓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림2. 국내개발 백곰. 현무2, 순항 미사일들
그림 3. 국내 개발 대잠, 대함 미사일들
Texas대학에서의 석박사과정
ADD에 4년 의무복무 후 제대한 후에도
2년간 더 근무하면서 새로 건설한 풍동 시험 업무를 보다가 1979년 가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 오스틴에 소재한 텍사스대학 항공우주공학과의 석사학생으로 그리고 국내에서의 풍동 시험
경력을 토대로 풍동실 조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DD 풍동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인 아음속 풍동에서 일을 보면서 많은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학기를 마치고는 당시 유행이었던 유한요소법의 세계적인 대가인 Oden 교수 연구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Hard working을
좋아하시는 교수님은 코스도 많이 시키고 특히 수학과목을 많이 듣게 해서 대학원 시절 Functional
Analysis등 교수님 직강 4과목 포함해서 8과목의
수학 과목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어려웠지만 실험 경력의 본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의
입문이었고 후에 대학에서 강의,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산업응용수학회 설립하면서 회장직을 맡으면서 국내 응용수학 분야를 되는 발전시키게 되는 계기도 되었지요.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
지도교수의 엄청난 독려 덕분에 논문도 많이 쓸 수 있게 되어 1986년에는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교수로 임용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수로 와보니 교육, 연구 여건이 아직 열악했지만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6개월
장교라는 박사특례제도 덕분인지 우수한 대학원생, 특히 박사과정에 많은 학생들이 모이면서 연구 분위기가
성숙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실험시설이나 컴퓨터 등의 장비들이 취약해서 우선 이론적인 논문 쓰는데 집중해야겠다고 정했지요. 당시
모두의 관심사였던 국제학술지 논문을 주된 목표로 하고 학생의 논문 발표를 독려했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과학기술부의 목적기초연구비 등 제대로 된 연구비 지원이 생기는 등 대학원 연구 분위기가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습니다.
ADD근무시절부터 컴퓨터 쓰는 것을 좋아해서 KIST의 슈퍼컴퓨터를 많이
사용했었는데 유한요소법이 기본적으로 컴퓨터 수치해법이어서 컴퓨터 사용을 많이 하는 연유로 1988년부터 4년간 공과대학 전신실장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본부컴퓨터센터보다는
공과대학 전산실 환경이 좋았지만 VAX730한대의 컴퓨터로 공대 전체의 수요를 감당하기 버거웠지요. 마침 워크스테이션이라고 그래픽기능이 탑재된 공학용 서버들이 유행을 시작할 때라 과감하게 공과대학에 수십 대의
그래픽 워크스태이션을 도입했습니다. 요즈음의 네트워크화된 전산환경을 만든 것이었지요. 1994년부터는 공과대학 기획실장을 맡아 신공학관 등의 공과대학 시설확장을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가 되면서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시작하고 슈퍼컴퓨터들도 여러 개의 CPU를
가지게 되면서 병렬컴퓨팅이 대규모계산을 빠른 시간 내에 하려면 필수 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인의
전공이 대형 항공우주 비행체 구조물의 안전성을 해석하는 것이라 고성능의 정밀해석을 위해서는 병렬 알고리듬 개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핵심 알고리듬으로 병렬 Frontal Solver를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범용성을 가진 유한요소해석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97년경에는 제법 범용성이
있게 완성되어 소프트웨어 이름을, 인터넷 상에서 병렬컴퓨팅이 가능한 유한요소해석 프로그램이란 의미로, IPSAP(Internet Parallel Structural Analysis Program, http://ipsap.snu.ac.kr)이란 이름을 지어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Gordon
Bell상 수상과
Microsoft와의 인연
병렬 유한요소 알고리듬을 개발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효율성을 테스트할 테스트베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KISTI 슈퍼컴퓨터가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쓰고 있어 우리가 원하는 때 언제나 다른 사용자의 접근이 없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수백 개의 CPU를
사용하고 있더라도 한두 개의 CPU가 다른 프로그램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면 알고리듬의 병렬 효율성 측정이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PC를 연결한 병렬 컴퓨터
시스템을 슈퍼컴퓨터 수준으로까지 올려 보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마침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슈퍼컴퓨팅
컨퍼런스(SC)에서 Gordon Bell Award라고 슈퍼컴퓨팅기술
경진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니 다른 것은 우리의 규모로는 시도 자체가 어렵고 Price Performance(가격대비성능, 소위 가성비 )가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되어 용산에서 최고로 저렴한 부품을 사다가 연결한 다음 가장 병렬 효율이 좋은 최적화
문제를 풀어 2001년 가을 SC2001에서 Gordon Bell Award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용기가
나서 본격적인 슈퍼컴퓨터 성능이 나오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어 산업체에 손을 벌려 보기로 했습니다. Microsoft의 Steve Balmer사장에게 편지 담긴 소포를 보냈지요. 이메일
주소를 인터넷 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Balmer 회장에게 편지로 20만
달러만 지원해주면 Gordon Bell 상 받은 기술을 토대로 해서 윈도우 베이스로 클러스터 슈퍼컴퓨터를
만들어 세계 슈퍼컴 랭킹 100위안에 올려 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 만해도 클러스터 컴퓨터들은 대부분 리눅스 기반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우편물 보낸 지 1주일쯤 후에 답이 왔습니다. 회사 내 관련 담당에게 받은 편지를
전달했으니 곧 연락이 갈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텔레컨퍼런스를 통해서 왜 Microsoft가 김승조교수를 지원해야
되는지를 설득해 보라는 것이었지요. 그 쪽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학교 나와 텔레컨퍼런스를 했습니다. 그런대로 설득이 되었는지 며칠 후 메일이 오기를 MS Korea를
통해 1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요구보다는 금액이
적긴 했지만 시작하기로 하고 인텔사와 삼성전자를 설득하여 추가 지원을 받기로 하고 당시의 정운찬총장님을 모시고 서울대, MS Korea, Intel Korea, 삼성전자의 산학협력 조인식을 통해 협력선을 구축했습니다.
그 후 바쁘게 필요부품들을 구입 설계하여 컴퓨터 하드웨어 조립 및 소프트웨어 시스템구성을 하였고 작동성
체크, 네트워크구성, 연동성확인, 각종 소프트웨어 설치 그리고 속도 최적화에 이르는 일체의 일을 총괄해서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연구실 대학원생들이 엄청나게 고생했었지요. PEGASUS라고
명명된 이 클러스터를 2002년 하반기 슈퍼컴 세계랭킹 86위에
올려서 MS에 약속한 목표를 자랑스럽게 초과 달성하게 되었고 그 후 시스템의 CPU 숫자를 520개까지 증설해서
1.1 Tflops를 달성해 2003년 상반기 랭킹에서는 세계 56위(국내 1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림 5. 개발된
PEGASUS Cluster Supercomputer와 세계 56위 증서
Microsoft와는 이런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2006년에는 우리 연구실의 Windows OS를
기반으로 한 연구실의 PEGASUS Supercomputer를 구경하러 온 John HEY 부사장에게 “하드웨어 도움을 주었으니 이번엔 Software 개발에 지원금을 달라”고 공동연구 제안을 했었습니다. 설득이 주효했는지 받아 들여져서 2007년 1월에는 이장무 당시 총장님을 모시고 Microsoft와 Supercomputing 연구 관련 MOU를 체결하고, 3년간 39만 600달러의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닥친 금융 위기로 인해 환율이 높아져 달러로 39만 6000 달러의 연구비의 총액이 한화로 거의 6억원에 달하여 지속적인 연구 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 6. 이장무총장님 모시고 MS와 산학협력 MOU
그런데 무료로 IPSAP을 배포했으나 큰 반응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결과 당시에도 이미 보편화된 사용하기에 편리한 전용 GUI(Graphic User Interface)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Microsoft로부터
IPSAP의 편리성을 강화하겠다고 받은 연구비를 토대로 Graphic Pre-Post
Processor, DIAMOND,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경에는 쓸만한 DIAMOND/IPSAP 프로그램이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배포용 website(http://ipsap.snu.ac.kr)를 만들어 보급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수직이착륙 드론, Cyclocopter 개발과 관련 응용 연구
그림 8. 개발 성공한 Cyclocopter 비행 모습과 Cyclo Wind Turbine 설치
모습
2000년경에 당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개발 중인 비행선 추진 제어 장치로 고려하고 있는 Cyclo Propulsion System(CPS)의 개념도를 보는 순간 이걸 수직이착륙용 항공기 추진 장치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시 몇몇 학생들에게 문헌조사를 시키고 항우연으로부터도 자료를 좀 얻었습니다. 연구실에서는 연구팀을 꾸리고 수직이착륙 항공기의 추진 시스템으로 적용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실험용 로터를 만들어 블레이드 갯수, 블레이드 코드길이, 회전 속도, 최대각, 회전 반경 등을 변화시키면서 Cyclo Blade System의 기본 특성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적인 특성을 파악했다 싶어 제 1호기를 4개 블레이드를 가진 2개의 로터 시스템을 설계 제작했으나 과도한 무게와 엔진의 부실로 날지 못했습니다. 그 후 수년간의 지루한 노력 끝에 드디어 연구실 건물 옥상에 크레인을 설치하고 줄에 매달린 상태에서의 실험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2012년, 드디어 완벽한 비행에 성공하게 되었다. 언론에도 자료를 배포했더니 여러 방송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10여년의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흥미 있는 일은 우리 연구실의 Cyclocopter 개발현황을 보고 간 미국 Maryland 대학의 Chopra교수도 Cyclocopter 연구를 시작해 이 분야의 우군이 생겨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Cyclocopter를 개발하면서 이 기술을 응용한 풍력, 수력발전장치도 연구하였습니다. 수력발전장치를 개발하여 국립수산과학원에 의뢰하여 회류형 수조에서 성공적인 실험도 하였습니다. 수직축 풍력발전장치를 개발하여 상품가치가 있는 가로등용 독립전력 형 사이클로이달 풍력발전장치를 완성하였습
니다. 효율을 입증하기 위하여 차량을 이용한 정풍속 실험을
하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협조를 통해 제주도 소형풍력인증용 실험부지에서 필드테스트까지 마쳤지요. 시장
경쟁력 있는 제작비용과 높은 효율 등 원하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결과였습니다. 또한, 수직축 풍력발전장치의 블레이드에 LED를 수십 개 장착하여 잔상디스플레이
효과를 이용한 Displayable 풍력발전장치를 개발하고 특허도 등록하였습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으로의
활동
2차에 걸친 나로호의 발사 실패로 공석이 된 항공우주연구원 원장에
선임되어 급작스럽게 대전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항우연의 조직문화는 문제점이 많았고 하부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항우연의 일부 조직은 연구하는 집단이라기보다는 조폭 집단에 가깝다고 하는 분도 계셨으니 말입니다. 본인은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전 직원들에게 개인적의 건의사항이나 애로사항들을 원장 이메일 주소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자연히 많은 직원들이 다양한 건의와 애로를 토로해 왔고, 역시 조직문화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팀을 옮기고 싶다고 했고 팀장이나 실장에 대해 불편함이 많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한 끝에 대대적인 조직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우선
새로운 조직 체계를 만들면서 부원장실서부터, 연구소, 단, 센터, 실, 부, 팀의 조직 단위를 모두 개편 한 후 전 직원을 현재 소속된 팀에서 전부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인들이 원하는 바대로 새 조직의 팀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소속팀
자율 선택제도였습니다. 일단 자율선택을 위한 세부 규칙도 만들어 기존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지장 받지
않게 어느 한 팀에 몰리거나 어느 팀이 모자라게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나로호 발사 추진단과
같이 3차 발사 준비에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되는 조직은 일단 그대로 두었습니다. 개인의 희망에 따른 전체 직원의 배치 후에는, 팀원이 많거나 적어서
문제가 된 일부 팀들에 대해서는 일대일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팀원 구성을 완성한 후 팀장
선출에 들어갔습니다. 팀장은 인원이 아주 적은 팀을 제외하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각 팀이 선발하도록
했습니다. 팀장 자율 선출제도였습니다. 어떤 팀은 투표로
어떤 팀은 열띤 토론으로 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팀원들을 발령을 내고, 팀원들에 의해 결정된 팀장들의 의견을 감안해 그 상위 조직의 장들은 원장이 결정했습니다. Bottom-Up과 Top-Down 방식을 혼합한 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적인 팀장 선출은 원장 임기 동안 단 한 번 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반복하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거나 혹은 조직이 힘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아주 신선했고 대부분 만족하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이렇게 우선적으로 조직을 안정화시키고, 그 다음은 연구 사업에 신경을 썼습니다. 항우연은 다른 출연연과
달리 적은 수효의 과제를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업하는 형태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크게, 중형항공기 사업, 나로호 발사 사업, 한국형발사체 개발사업, 3호, 5호
아리랑위성 개발 사업에 1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각각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 원장이 신경 써야 할 일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우선 매년 엄청난 금액의 사업예산확보에서부터 관련 부처와의 조율, 국회의
이해를 구하는 일 등을 해야 했고, 초대형 사업은 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나로호의 경우는 러시아와의 2차 발사 실패에 대한 책임의 규명과 3차 발사 여부를 결정해야 했고, 5호위성의 경우 러시아 드네프르
발사체 주관사와 러시아 정부와의 분쟁으로 생긴 발사 지연문제도 원장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연구원 내부의 행정적인 경영업무는 작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림 9. 항우연 로고, NASA 청장 Charles Bolden과 함께
그러나 연구원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운도 따라 주어 2011년
스마트무인기 시험비행성공, 2012년 아리랑 3호위성 발사
성공, 2013년 나로호 발사 성공과 아리랑 5호위성과 과학위성 3호 발사 성공 등 몇 천억을 들여 개발한 각종 시스템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특히 아리랑 3호와 5호는
서울대학 교수로서 기획연구책임을 맡으면서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원장으로서 마음을 졸이기는 했지만 발사성공을 책임졌기에 인연이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10. 인공위성과 나로호의 성공적인 발사
마지막으로 보람 있었던 일은 나로호 3차 발사 준비로 힘들 때 항우연이라는
조직이 나로호 하나에 매여 꼼짝달싹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연구원의 많은 인원들을 참가 시켜 2040년까지의
항우연 항공우주 2040 비전을 만든 것입니다. 이 중 우주비전은
결국 정부에 의해 채택이 되어 대한민국의 2040 우주개발 로드맵으로 결정되었기에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항공기 분야의 저변 기술 확보와 젊은 학생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작한 인간 동력 항공기 경진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또 항공분야의 많은 분들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어 본인으로서는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로 복귀 그리고
은퇴
항우연 원장 임기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 오니 정년이 한해 남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 아직도 졸업논문을 써야 할 연구실 학생들이 열명 가까이 있어 “졸업 논문 쓰기 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전쟁에 나선 전사들처럼 열심히들 해서 결국 2015년 마지막 학기까지 모두 졸업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간의 교수와 국가출연 연구원장 경험을 살려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14년 말부터 1년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국방부나
공군의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취미인 슈퍼컴퓨터 분야의 새 기술과 친해지기 위해
슈퍼컴퓨팅 전문 기업으로 코코링크라는 소규모 벤처회사에서 기술고문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항공우주 전 분야에 걸친 관심사, 특히, 지구정지궤도에서 태양광 발전한 후 지구로 무선 전송하여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자는 우주기반 태양광발전기술
관련 글 등을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면서 항공우주기술 전파에 애쓰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psssjk)
그리고 2017년 초부터는 룩셈부르그 국가 우주자문위원으로서
우주자원과 관련 기술에 관해 자문해오고 있습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활동
2016년 한림원 제 8대
이명철원장의 취임과 함께 한림원 기획정책 담당 부원장 임무를 맡아 한림원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2017부터는
한림원 정책연구소장도 겸임하면서 지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차기정부에 바라는 과학기술정책 아젠다 작성추진위원장을 맡아 한림원의 입장을 대통령 후보들에게
전달한 바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림원 Science Week의
주요행사인 Nobel Prize Dialogue의 조직위원장으로써 필요비용 염출과 Sweden의 노벨재단과 협력으로 행사계획
성안, 노벨수상자 초청 등을 통해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노력해온 바 있습니다.
2년여의 부원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바라본 한림원은 현재까지의
발전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개선해야할 점들도 눈에 띄어 앞서 여러번 이메일로 보내드린 바처럼 제 나름대로의 발전 방안을 마련하여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 보자는 생각에 차기원장 선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