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8

김승조 원장후보 자기소개서


원장후보 본인 소개서

성명 : 김 승 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생년월일 : 1950 6 24

  상기 본인은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선거에 입후보하면서 이 소개서를 씁니다.

지난 1994년 창립이래로 선배 과학기술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국제적인 학술할동을 주최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기술에 관련된 정책조언과 제안을 통해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대표적인 엘리트 과학기술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80억이 넘는 예산으로 Nobel Prize Dialogue, IASSF(InterAcademy Seoul Science Forum)등의 국제회의와 한림원탁토론회, 한림학술대회 등을 개최하면서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2016년부터 한림원 기획정책 담당 부원장 일을 보면서 한림원탁토론회, 한림정책연구 등에 관련하였고  지난해부터는 한림원 정책연구소장도 겸임하면서 Nobel Prize Dialogue의 조직위원장으로써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2년여의 부원장 업무를 보면서 바라본 한림원은 현재까지의 발전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고 개선해야할 점들도 눈에 띄어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 보자는 생각에 감히 차기원장 선거에 나서게 되었으며 원장후보로써의 제 이력을 말씀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다음의 좀 긴 글을 써 봅니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의 연구활동

  본인은 1973년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자주국방의 기치아래 국방과학연구소(ADD)를 만들고 미사일 개발을 계획하면서 과학장교라는 공채 과정을 통해 훈련을 마치고 장교 임관 후 ADD에서 연구개발 업무에 종사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운 좋게도 여기에 합격하여 5개월의 공군장교 훈련, 그리고 공군 67기로써 임관 후 6개월 대구  동촌 비행장 현지 복무 후에 서울에 있던 ADD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대공포 훈련용 표적기(Target Drone, 드론이 요즈음 나타난 것으로 아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드론의 역사는 이와 같이 오래되었습니다)를 역설계하는 작업에 참가했다가 1년 후부터는 풍동시험 분야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나이키 미사일을 모방한 NHK(후에 백곰으로 명명됨)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풍동시험실에서는 개발 중인 미사일들의 최적형상을 찾아내기 위해 축소형 모형을 만들어 각종 공기역학적 특성을 시험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사일의 대부분 비행 경로 속도가 초음속이라 그 특성시험도 초음속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주 고가의 3중 음속 풍동시험시설을 외국기술로 건설하고 있었고 우리 연구원들은 시험실설치, 시험 운용기법 등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3중 음속 풍동은 그 당시로는 초대형 최신식의 자동화된 시설로서 전용 중형컴퓨터가 달려 있었고 풍속이나 받음각등도 자동 조절되면서 아음속, 천음속, 그리고 마하수 4.5까지 시험이 가능한 73년 당시 가격으로 700만 달러 이상의 초고가의 시험시설이었습니다. 이 풍동의 운영을 배우기 위해 75년과 76년에는 풍동을 설계한 FluiDyne사가 있는 미네소타 방문과 같은 기능의 풍동을 보유한 댈러스의 Vought Aerospace사로 연수를 가서 새로운 운용기술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본인은 모두 수입 구매해서 쓰고 있는 초음속 풍동용 6분력 측정장치인 밸런스를 국산화한다고 열심히 뛰어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본인이 설계 개발한 밸런스와 미사일의 풍동 모형 사진이며 당시의 국산화 노력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ADD 풍동시험실은 세계적인 수준의 시설과 장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림 1.  개발된 미사일 풍동 모형과 6분력 밸런스 측정기

현재까지 ADD는 우리 군이 필요로 하는 지대지, 지대공, 대함, 대잠, 순항미사일 등의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각종 국방용 미사일 들을 성공적으로 개발해 왔고 풍동시험 시설이 연구개발을 뒷받침해왔습니다. 이들 ADD가 개발한 미사일들은 유사시 즛시 발사가 가능해야 해서 주로 고체연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장거리 미사일은 우리의 국방정책 상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견제에 의해 연구 개발이 제한되어 있다가 우주발사체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민간 우주기술 개발 차원에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1999년부터 더 큰 추력을 낼 수 있는 액체로켓 엔진 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림2.  국내개발 백곰현무2, 순항 미사일들


       그림 3.  국내 개발 대잠, 대함 미사일들


Texas대학에서의 석박사과정

  ADD 4년 의무복무 후 제대한 후에도 2년간 더 근무하면서 새로 건설한 풍동 시험 업무를 보다가 1979년 가을 미국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 오스틴에 소재한 텍사스대학 항공우주공학과의 석사학생으로 그리고 국내에서의 풍동 시험 경력을 토대로 풍동실 조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DD 풍동에 비하면 장난감 수준인 아음속 풍동에서 일을 보면서 많은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학기를 마치고는 당시 유행이었던 유한요소법의 세계적인 대가인 Oden 교수 연구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Hard working을 좋아하시는 교수님은 코스도 많이 시키고 특히 수학과목을 많이 듣게 해서 대학원 시절 Functional Analysis등 교수님 직강 4과목 포함해서 8과목의 수학 과목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는 어려웠지만 실험 경력의 본인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의 입문이었고 후에 대학에서 강의,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국산업응용수학회 설립하면서 회장직을 맡으면서 국내 응용수학 분야를 되는 발전시키게 되는 계기도 되었지요.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

  지도교수의 엄청난 독려 덕분에 논문도 많이 쓸 수 있게 되어 1986년에는 서울대학교 항공공학과 교수로 임용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교수로 와보니 교육, 연구 여건이 아직 열악했지만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6개월 장교라는 박사특례제도 덕분인지 우수한 대학원생, 특히 박사과정에 많은 학생들이 모이면서 연구 분위기가 성숙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실험시설이나 컴퓨터 등의 장비들이 취약해서 우선 이론적인 논문 쓰는데 집중해야겠다고 정했지요. 당시 모두의 관심사였던 국제학술지 논문을 주된 목표로 하고 학생의 논문 발표를 독려했고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된 과학기술부의 목적기초연구비 등 제대로 된 연구비 지원이 생기는 등 대학원 연구 분위기가 자리를 잡는 느낌이었습니다.
  ADD근무시절부터 컴퓨터 쓰는 것을 좋아해서 KIST의 슈퍼컴퓨터를 많이 사용했었는데 유한요소법이 기본적으로 컴퓨터 수치해법이어서 컴퓨터 사용을 많이 하는 연유로 1988년부터 4년간 공과대학 전신실장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학본부컴퓨터센터보다는 공과대학 전산실 환경이 좋았지만 VAX730한대의 컴퓨터로 공대 전체의 수요를 감당하기 버거웠지요. 마침 워크스테이션이라고 그래픽기능이 탑재된 공학용 서버들이 유행을 시작할 때라 과감하게 공과대학에 수십 대의 그래픽 워크스태이션을 도입했습니다. 요즈음의 네트워크화된 전산환경을 만든 것이었지요. 1994년부터는 공과대학 기획실장을 맡아 신공학관 등의 공과대학 시설확장을 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가 되면서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시작하고 슈퍼컴퓨터들도 여러 개의 CPU를 가지게 되면서 병렬컴퓨팅이 대규모계산을 빠른 시간 내에 하려면 필수 불가결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본인의 전공이 대형 항공우주 비행체 구조물의 안전성을 해석하는 것이라 고성능의 정밀해석을 위해서는 병렬 알고리듬 개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핵심 알고리듬으로 병렬 Frontal Solver를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범용성을 가진 유한요소해석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97년경에는 제법 범용성이 있게 완성되어 소프트웨어 이름을, 인터넷 상에서 병렬컴퓨팅이 가능한 유한요소해석 프로그램이란 의미로, IPSAP(Internet Parallel Structural Analysis Program, http://ipsap.snu.ac.kr)이란 이름을 지어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Gordon Bell상 수상과 Microsoft와의 인연

  병렬 유한요소 알고리듬을 개발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효율성을 테스트할 테스트베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KISTI 슈퍼컴퓨터가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쓰고 있어 우리가 원하는 때 언제나 다른 사용자의 접근이 없이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수백 개의 CPU를 사용하고 있더라도 한두 개의 CPU가 다른 프로그램에 의해 사용되고 있으면 알고리듬의 병렬 효율성 측정이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PC를 연결한 병렬 컴퓨터 시스템을 슈퍼컴퓨터 수준으로까지 올려 보자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마침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슈퍼컴퓨팅 컨퍼런스(SC)에서 Gordon Bell Award라고 슈퍼컴퓨팅기술 경진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니 다른 것은 우리의 규모로는 시도 자체가 어렵고 Price Performance(가격대비성능, 소위 가성비 )가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되어 용산에서 최고로 저렴한 부품을 사다가 연결한 다음 가장 병렬 효율이 좋은 최적화 문제를 풀어 2001년 가을 SC2001에서 Gordon Bell Award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용기가 나서 본격적인 슈퍼컴퓨터 성능이 나오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단히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어 산업체에 손을 벌려 보기로 했습니다. Microsoft Steve Balmer사장에게 편지 담긴 소포를 보냈지요. 이메일 주소를 인터넷 상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Balmer 회장에게 편지로 20만 달러만 지원해주면 Gordon Bell 상 받은 기술을 토대로 해서 윈도우 베이스로 클러스터 슈퍼컴퓨터를 만들어 세계 슈퍼컴 랭킹 100위안에 올려 보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때까지 만해도 클러스터 컴퓨터들은 대부분 리눅스 기반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우편물 보낸 지 1주일쯤 후에 답이 왔습니다. 회사 내 관련 담당에게 받은 편지를 전달했으니 곧 연락이 갈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텔레컨퍼런스를 통해서 왜 Microsoft가 김승조교수를 지원해야 되는지를 설득해 보라는 것이었지요. 그 쪽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학교 나와 텔레컨퍼런스를 했습니다. 그런대로 설득이 되었는지 며칠 후 메일이 오기를 MS Korea를 통해 1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요구보다는 금액이 적긴 했지만 시작하기로 하고 인텔사와 삼성전자를 설득하여 추가 지원을 받기로 하고 당시의 정운찬총장님을 모시고 서울대, MS Korea, Intel Korea, 삼성전자의 산학협력 조인식을 통해 협력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림 4.  2002년 삼성전자, Microsoft, Intel과 정운찬총장 모시고 MOU

그 후 바쁘게 필요부품들을 구입 설계하여 컴퓨터 하드웨어 조립 및 소프트웨어 시스템구성을 하였고 작동성 체크, 네트워크구성, 연동성확인, 각종 소프트웨어 설치 그리고 속도 최적화에 이르는 일체의 일을 총괄해서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연구실 대학원생들이 엄청나게 고생했었지요. PEGASUS라고 명명된 이 클러스터를 2002년 하반기 슈퍼컴 세계랭킹 86위에 올려서 MS에 약속한 목표를 자랑스럽게 초과 달성하게 되었고 그 후 시스템의 CPU 숫자를 520개까지 증설해서 1.1 Tflops를 달성해 2003년 상반기 랭킹에서는 세계 56(국내 1)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림 5.  개발된 PEGASUS Cluster Supercomputer와 세계 56위 증서

Microsoft와는 이런 인연이 계속 이어져서 2006년에는 우리 연구실의 Windows OS를 기반으로 한 연구실의 PEGASUS Supercomputer를 구경하러 온 John HEY 부사장에게 하드웨어 도움을 주었으니 이번엔 Software 개발에 지원금을 달라고 공동연구 제안을 했었습니다. 설득이 주효했는지 받아 들여져서 2007 1월에는 이장무 당시 총장님을 모시고 Microsoft Supercomputing 연구 관련 MOU를 체결하고, 3년간 39 600달러의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닥친 금융 위기로 인해 환율이 높아져 달러로 39 6000 달러의 연구비의 총액이 한화로 거의 6억원에 달하여 지속적인 연구 활동에 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림 6.  이장무총장님 모시고 MS와 산학협력 MOU

  그런데 무료로 IPSAP을 배포했으나 큰 반응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결과 당시에도 이미 보편화된 사용하기에 편리한 전용 GUI(Graphic User Interface)가 없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Microsoft로부터 IPSAP의 편리성을 강화하겠다고 받은 연구비를 토대로 Graphic Pre-Post Processor, DIAMOND,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2008년경에는 쓸만한 DIAMOND/IPSAP 프로그램이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배포용 website(http://ipsap.snu.ac.kr)를 만들어 보급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7.  DIAMOND/IPSAP 소프트웨어와 일부 기능 예시


새로운 수직이착륙 드론, Cyclocopter 개발과 관련 응용 연구

       그림 8.  개발 성공한 Cyclocopter 비행 모습과 Cyclo Wind Turbine 설치 모습

  2000년경에 당시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에서 개발 중인 비행선 추진 제어 장치로 고려하고 있는 Cyclo Propulsion System(CPS)의 개념도를 보는 순간 이걸 수직이착륙용 항공기 추진 장치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시 몇몇 학생들에게 문헌조사를 시키고 항우연으로부터도 자료를 좀 얻었습니다. 연구실에서는 연구팀을 꾸리고 수직이착륙 항공기의 추진 시스템으로 적용하기 위한 기초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실험용 로터를 만들어 블레이드 갯수, 블레이드 코드길이, 회전 속도, 최대각, 회전 반경 등을 변화시키면서 Cyclo Blade System의 기본 특성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정도 기술적인 특성을 파악했다 싶어 제 1호기를 4개 블레이드를 가진 2개의 로터 시스템을 설계 제작했으나 과도한 무게와 엔진의 부실로 날지 못했습니다. 그 후 수년간의 지루한 노력 끝에 드디어 연구실 건물 옥상에 크레인을 설치하고 줄에 매달린 상태에서의 실험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2012, 드디어 완벽한 비행에 성공하게 되었다. 언론에도 자료를 배포했더니 여러 방송 신문에도 보도가 되었습니다 10여년의 시도가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흥미 있는 일은 우리 연구실의 Cyclocopter 개발현황을 보고 간 미국 Maryland 대학의 Chopra교수도 Cyclocopter 연구를 시작해 이 분야의 우군이 생겨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Cyclocopter를 개발하면서 이 기술을 응용한 풍력, 수력발전장치도 연구하였습니다. 수력발전장치를 개발하여 국립수산과학원에 의뢰하여 회류형 수조에서 성공적인 실험도 하였습니다. 수직축 풍력발전장치를 개발하여 상품가치가 있는 가로등용 독립전력 형 사이클로이달 풍력발전장치를 완성하였습

니다. 효율을 입증하기 위하여 차량을 이용한 정풍속 실험을 하고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의 협조를 통해 제주도 소형풍력인증용 실험부지에서 필드테스트까지 마쳤지요. 시장 경쟁력 있는 제작비용과 높은 효율 등 원하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결과였습니다. 또한, 수직축 풍력발전장치의 블레이드에 LED를 수십 개 장착하여 잔상디스플레이 효과를 이용한 Displayable 풍력발전장치를 개발하고 특허도 등록하였습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원장으로의 활동



 2차에 걸친 나로호의 발사 실패로 공석이 된 항공우주연구원 원장에 선임되어 급작스럽게 대전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항우연의 조직문화는 문제점이 많았고 하부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항우연의 일부 조직은 연구하는 집단이라기보다는 조폭 집단에 가깝다고 하는 분도 계셨으니 말입니다. 본인은 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전 직원들에게 개인적의 건의사항이나 애로사항들을 원장 이메일 주소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자연히 많은 직원들이 다양한 건의와 애로를 토로해 왔고, 역시 조직문화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팀을 옮기고 싶다고 했고 팀장이나 실장에 대해 불편함이 많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한 끝에 대대적인 조직변화를 주기로 했습니다. 우선 새로운 조직 체계를 만들면서 부원장실서부터, 연구소, , 센터, , , 팀의 조직 단위를 모두 개편 한 후 전 직원을 현재 소속된 팀에서 전부 해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본인들이 원하는 바대로 새 조직의 팀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소속팀 자율 선택제도였습니다. 일단 자율선택을 위한 세부 규칙도 만들어 기존 진행되고 있는 연구가 지장 받지 않게 어느 한 팀에 몰리거나 어느 팀이 모자라게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나로호 발사 추진단과 같이 3차 발사 준비에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되는 조직은 일단 그대로 두었습니다. 개인의 희망에 따른 전체 직원의 배치 후에는, 팀원이 많거나 적어서 문제가 된 일부 팀들에 대해서는 일대일 대화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팀원 구성을 완성한 후 팀장 선출에 들어갔습니다. 팀장은 인원이 아주 적은 팀을 제외하고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각 팀이 선발하도록 했습니다. 팀장 자율 선출제도였습니다. 어떤 팀은 투표로 어떤 팀은 열띤 토론으로 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팀원들을 발령을 내고, 팀원들에 의해 결정된 팀장들의 의견을 감안해 그 상위 조직의 장들은 원장이 결정했습니다. Bottom-Up Top-Down 방식을 혼합한 인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적인 팀장 선출은 원장 임기 동안 단 한 번 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반복하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거나 혹은 조직이 힘을 잃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많은 직원들이 아주 신선했고 대부분 만족하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이렇게 우선적으로 조직을 안정화시키고, 그 다음은 연구 사업에 신경을 썼습니다. 항우연은 다른 출연연과 달리 적은 수효의 과제를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업하는 형태입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크게, 중형항공기 사업, 나로호 발사 사업, 한국형발사체 개발사업, 3, 5호 아리랑위성 개발 사업에 1000명에 가까운 직원이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각각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기 위해서 원장이 신경 써야 할 일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우선 매년 엄청난 금액의 사업예산확보에서부터 관련 부처와의 조율, 국회의 이해를 구하는 일 등을 해야 했고, 초대형 사업은 원장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나로호의 경우는 러시아와의 2차 발사 실패에 대한 책임의 규명과 3차 발사 여부를 결정해야 했고, 5호위성의 경우 러시아 드네프르 발사체 주관사와 러시아 정부와의 분쟁으로 생긴 발사 지연문제도 원장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연구원 내부의 행정적인 경영업무는 작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림 9.  항우연 로고, NASA 청장 Charles Bolden과 함께



그러나 연구원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운도 따라 주어 2011년 스마트무인기 시험비행성공, 2012년 아리랑 3호위성 발사 성공, 2013년 나로호 발사 성공과 아리랑 5호위성과 과학위성 3호 발사 성공 등 몇 천억을 들여 개발한 각종 시스템들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특히 아리랑 3호와 5호는 서울대학 교수로서 기획연구책임을 맡으면서 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원장으로서 마음을 졸이기는 했지만 발사성공을 책임졌기에 인연이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10. 인공위성과 나로호의 성공적인 발사


  마지막으로 보람 있었던 일은 나로호 3차 발사 준비로 힘들 때 항우연이라는 조직이 나로호 하나에 매여 꼼짝달싹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연구원의 많은 인원들을 참가 시켜 2040년까지의 항우연 항공우주 2040 비전을 만든 것입니다. 이 중 우주비전은 결국 정부에 의해 채택이 되어 대한민국의 2040 우주개발 로드맵으로 결정되었기에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항공기 분야의 저변 기술 확보와 젊은 학생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시작한 인간 동력 항공기 경진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또 항공분야의 많은 분들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어 본인으로서는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로 복귀 그리고 은퇴

  항우연 원장 임기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 오니 정년이 한해 남게 되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 아직도 졸업논문을 써야 할 연구실 학생들이 열명 가까이 있어 졸업 논문 쓰기 대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전쟁에 나선 전사들처럼 열심히들 해서 결국 2015년 마지막 학기까지 모두 졸업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간의 교수와 국가출연 연구원장 경험을 살려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14년 말부터 1년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국방부나 공군의 정책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취미인 슈퍼컴퓨터 분야의 새 기술과 친해지기 위해 슈퍼컴퓨팅 전문 기업으로 코코링크라는 소규모 벤처회사에서 기술고문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항공우주 전 분야에 걸친 관심사, 특히, 지구정지궤도에서 태양광 발전한 후 지구로 무선 전송하여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자는 우주기반 태양광발전기술 관련 글 등을 네이버 블로그에 올리면서 항공우주기술 전파에 애쓰고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spsssjk)
그리고 2017년 초부터는 룩셈부르그 국가 우주자문위원으로서 우주자원과 관련 기술에 관해 자문해오고 있습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활동

2016년 한림원 제 8대 이명철원장의 취임과 함께 한림원 기획정책 담당 부원장 임무를 맡아 한림원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2017부터는 한림원 정책연구소장도 겸임하면서 지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차기정부에 바라는 과학기술정책 아젠다 작성추진위원장을 맡아 한림원의 입장을 대통령 후보들에게 전달한 바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림원 Science Week의 주요행사인 Nobel Prize Dialogue의 조직위원장으로써 필요비용 염출과  Sweden의 노벨재단과 협력으로 행사계획 성안, 노벨수상자 초청 등을 통해 성공적인 행사를 위해 노력해온 바 있습니다.
            그림 11.  2017 Science Week에 열린 Nobel Prize Dialogue IASSF

2년여의 부원장 업무를 수행하면서 바라본 한림원은 현재까지의 발전에 안주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개선해야할 점들도 눈에 띄어 앞서 여러번 이메일로 보내드린 바처럼 제 나름대로의 발전 방안을 마련하여 또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 보자는 생각에 차기원장 선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 감사합니다.





14.6.18

사이클로콥터 (Cyclocopter)의 개발과 비행 성공

 3. 개발 성공한 Cyclocopter

 다양한 형태의 사이클로콥터 설계, 개발, 시험 운전으로부터 얻은 자료를 토대로 안정적인 제자리 비행과 저속 수평비행을 목표로 쿼드로터 형태의 사이클로콥터를 설계했고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개발에 성공하게 되었다. 
4개의 로터를 배치했고 각 로터당 4개의 피치 각 조절 가능한 블레이드를 장착했고 비행체의 무게는 약 13 kg이었다. 2012년 10월 경, 처음으로 안정적으로 제자리 비행을 성공했다. 그 후 부차적인 개선을 통해 세계 최초로 실외 자유 비행에 성공하고, 현재는 제자리 비행 중 기체의 자세 변화 등 기체 기동 성능 향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 되었다.

최종으로 개발한 쿼드로터 사이클로콥터의 특징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로터는 네 개이고, 각 로터에는 또한 네 개의 블레이드가 장착되어 있음
  • 블레이드의 형상은 유도항력을 줄이기 위해 타원형 블레이드 채택
  • 로터 스포크의 형상은 두 개의 복합재료를 다수의 크로스 멤버로 연결한 형태에서 에어포일 단면을 갖는 반모노코크(Semi-Monocoque) 형태로 구성
  • 로터 설계에는 정적·동적 구조해석 및 유동해석을 통해 설계 변수 결정
  • 순간 최대 출력 8마력의 브러시리스 모터 및 리튬폴리머 배터리 장착
 



<사진/표> 13kg급 쿼드로터 사이클로콥터 및 그 제원


  서울대학교의 쿼드로터 사이클로콥터의 실외 자유비행을 통하여 충분히 비행체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보였기에 2012년경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110kg급 2-로터 사이클로콥터를 서울대학교와 협업하여 개발하였다. 프로펠러 타입의 테일로터는 양력 생성에도 기여하면서 메인로터에 의해 생성된 토크를 상쇄시키며, 기체의 피칭방향 자세를 제어한다. 지상실험 및 크레인을 이용한 안정성 실험을 통하여 제자리 비행 성능을 확인하였다. 진동이 적고 저회전 영역에서 토크특성이 좋은 로터리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였다.




<사진/표> 110kg급 2-로터 사이클로콥터 및 그 제원

 4. Cyclocopter 비행성공 언론 보도

MBN에서 방송한 신개념 수직이착륙기인 싸이클로콥터 비행성공 관련 링크 입니다.




2013년 2월 27일 한국형 수직이착륙 비행장치인 싸이클로콥터(Cyclocopter)가 공개 비행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싸이클로콥터는 서울대학교 항공우주구조연구팀(김승조 교수)에서 연구 개발중이던 비행장치로,Cycloidal Blade System을 이용한 4개의 날개로 자유자재로 하늘을 이동할 수 있는 장치입니다.

(이하 시연 모습)




새로운 개념의 수직이착륙 항공기, 사이클로콥터 (Cyclocopter)


1. 사이클로콥터란 무엇인가 ?

  사이클로콥터(Cyclocopter)는 새로운 개념의 수직이착륙(VTOL, Vertical Take-Off and Landing) 비행체로서,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Cycloidal blade system)을 적용한 회전익기의 한 종류로서 기존 헬리콥터와 달리 날개가 회전축과 평행하게 회전한다.
로터 시스템은 수평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각각의 블레이드는 피치운동을 하고, 이에 수평축에 수직인 방향으로 추력이 발생한다.

<사진> 서울대학교의사이클로콥터무인비행체


  서울대학교 기승조교수 연구팀이 2000년도 이후 사이클로콥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으며 여러 가지 개념의 테스트 기체를 이용하여 해석, 설계 및 실험을 수행하였고 Cyclocopter라는 이름도 연구팀의 김승조교수가 명명했다.

위의 사진은 세계최초로 실외 자유비행에 성공한 4개의 로터를 장착한 사이클로콥터 시험 비행체이다. 또한, 아래 사진은 110kg급 대형 사이클로콥터 무인비행체로 실험을 통하여 안정적인 비행 성능을 입증한 바 있다.


<영상> 서울대학교 사이클로콥터 실외 비행 시연 모습



2. 사이클로콥터는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첫째, 고기동 수직이착륙이 가능하다.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은 추력방향을 회전축을 중심으로 360도 자유롭게 전환할 수 있다. 따라서, 측풍이 심한 환경에서 수평을 유지하며 수직이착륙이 가능하고 심지어는 기울어진 상태로의 제자리비행도 가능하다. 따라서, 산비탈이나 빌딩의 수직면에도 착륙이 가능하다.


둘째, 기존 헬리콥터에 비해 공력소음이 적다.
 
  수직이착륙비행체로서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헬리콥터는 블레이드의 공력 소음이 심하다. 공력 소음은 저주파수 특성을 지니고 있어 상당히 먼거리까지 퍼져나간다. 군사, 정찰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러한 공력 소음을 줄이기 위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있지만 헬리콥터는 태생적으로 큰 공력소음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공기의 유동 속도는 블레이드 뿌리단에서 끝단으로 가면서 선형적으로 증가하여 끝단은 아음속이 달하는 높은 속도를 가진다. 로터의 윗면과 아래면의 심한 압력차이 또한 높은 공력 소음의 원인이다. 사이클로콥터는 이러한 공력소음이 상당히 적다. 블레이드의 길이방향으로 공기의 유동속도가 일정하기 때문에 특별히 유동속도가 높은 부분이 없다. 따라서 저소음이 요구되는 특수한 상황에 더욱 적합하다.


마지막으로, 고속 수평 비행시 안정성이 좋다.

  "틸트로터, 헬리콥터처럼 떠서 비행기처럼 난다." 요즘 각광 받고 있는 틸트로터, 스마트무인기의 장점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사이클로콥터를 2-로터 형태로 구성하면 스마트무인기의 이러한 장점을 갖추게 된다. 수평 비행시 원통형상으로 회전하고 있는 2개의 메인로터는 비행기의 주날개 역할을 하고 간단한 피치각 패턴의 변화를 통해 추력의 방향을 바꾸어 헬리콥터처럼 제자리 비행도 가능해진다. 또한, 틸트로터는 추력의 방향을 바꾸기 위하여 로터회전축을 기울이는 데에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 반면, 사이클로콥터는 심지어 추력 방향을 바꾸는 시간도 매우 짧다. 따라서, 추후 첨단항공전자의 제어기술을 통하여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의 추력 방향을 빠르고 정밀하게 제어하면 난기류가 상하로 발생하는 상공에서도 기체의 고도변화가 거의 없는 안정적인 수평비행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 (Cycloidal Blade System)

<그림> 사이클로이드블레이드시스템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은 1920년대부터 2차대전 이전까지 NACA 및 University of Washington 등에서 연구된 바 있으며, Bosch Aerospace 에서 비행체뿐만 아니라 비행선의 자세 제어 시스템 등으로의 응용 가능성에 대해서 연구가 진행된 적이 있다.

  다수의 블레이드로 이루어진 로터는 수평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며, 각각의 블레이드는 위상각()에 따라 일정한 궤적을 갖는 피치운동을 하게 되고, 원하는 방향으로 추력을 얻을 수 있다. 위의 그림은 로터의 회전에 대한, 블레이드 피치각의 변화와 그에 따라 발생하는 추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사이클로이드블레이드시스템의구동원리



  이러한 사이클로이드 블레이드 시스템은 위 그림과 같이 기구학적으로 연결되어 구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컨트롤 링크기구의 끝부분은 블레이드에 연결되어 있고 뿌리부분은 모두 한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림의 P점). P점은 중심축인 O점에서 편심된 양(e)만큼 추력의 크기가 결정되며 편심 방위각()에 따라 추력의 방향이 결정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피치각의 궤적을 달리하여 추력의 방향을 제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신속하게 원하는 방향으로 추력의 크기와 방향을 바꿔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추력 시스템으로서의 사이클로콥터 이외에도, 발전 시스템으로서 풍력 발전기 및 수력 발전기에 적용이 가능하다.

13.6.18

로켓개발의 성공조건



로켓엔진은 비록 오래된 기술이지만 현재의 기술로도 성공적인 작동을 예측하기 힘든 기계이다. 초고온과 초저온 문제를 동시에 다루어야 하고 초저온에 초고압의 산화제 혹은 연료를 잘 제어된 상태로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되어도 폭발하는 것이다. 그래서 로켓엔진 추진을 "잘 제어된 폭발"이라고 한다. 분사기, 연소기, 노즐, 터보펌프 등의 핵심부품 들이 제대로 작동해도 이들을 연결하는데 필요한 밸브, 씰, 배관 류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중요부품들의 연결부분에서 이상이 생겨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로켓 엔지니어들은 하는 일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상존하는 실패의 위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안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로켓엔진을 개발한 사람들은 상존하는 실패의 위험 속에서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을 낙으로 여기면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기꺼이 혼신의 노력을 바쳐서 결국 최고의 로켓을 만들어 내었다. 
나치의 V-2 로켓과 미국 Saturn-5 로켓의 von Braun, 소련 R-7( Soyuz 로켓의 전신, 1957년 세계 최초위성 Sputnik를 쏘아 올린 로켓 )의 Korolev, 중국 로켓 대부 Tsien, 일본 H-2 로켓의 Godai 등이 그 예이고, 최근에는 SpaceX의 Tom Mueller가 그 대표이리라.

로켓에 미쳐서 목숨을 바치다시피 하는 열정으로, 자다가 일어나서도 로켓의 기술적인 지휘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야 하지 않을까?. 상세한 로켓 기술지도가 머리 속에 완벽히 들어 있어 설계의 어느 부분을 고치면 어느 부분이 영향을 받고, 전체 추력은 어떻게 변할지 꿰뚫고 있는 총체적인 권한과 책임을 짊어진 그 한 명들이 결국은 성공적인 로켓 개발로 이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로켓 개발에 대한 기술적인 최고의 능력과 책임과 권한을 지닌 로켓기술에 깊은 애착을 가진 지휘자 아래의 중앙집중적인 조직에서라야 이 위험천만한 로켓이라는 물건이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처음으로 로켓을 개발해 보는 국가들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가장 최근의 사례인 Tom Mueller를 보자.

Idaho 대학 기계과를 졸업한 Tom Mueller는 어릴 때부터의 꿈인 로켓개발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캘리포니아로 왔지만 시골 대학 출신으로 직장 잡기가 쉽지 않았다. 처가살이를 하면서 기다린 끝에 결국 유명 항공우주업체인 TRW에 입사해 되어 로켓추진 관련 일을 맡게 된다. 그곳에서 Tom Mueller는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에도 사용된 '핀틀 인젝터'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액체 수소엔진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로켓 엔지니어의 꿈은 이뤘지만 이미 시스템화 된 회사에서 개인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산하고, 넘치는 창의성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의 꿈은 이미 TRW 너머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Tom Mueller는 퇴근 후나 주말에 자비를 들여 동호인들과 로켓 엔진을 만들었던 로켓 마니아였다. 동시에 난관에 봉착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문제를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야심만만한 엔지니어였다. 로켓 개발에 대한 자기 동기 부여로 충만했던 Tom Mueller가 우주개발의 야심찬 꿈을 갖고 있던 열정적인 Elon Musk를 만나면서 무서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Tom Mueller에게는 SpaceX에서 로켓 개발을 하는 것이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때로는 1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였다.

Tom Mueller는 퇴근 후면 자신의 차고에서 본인이 직접 설계한 로켓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또 주말이면 로켓 마니아 민간 클럽인 'RRS(Reaction Research Society)' 멤버들과 함께 모하비 사막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자신들이 만든 로켓을 실험하고 조립하면서 실제 로켓발사를 '모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모하비 사막에서 직접 만든 로켓을 실험하고 있다는 소문이 Elon Musk의 귀에 들어갔다. 마침 우주를 향한 남다른 꿈을 키우고 있던 Elon Musk는 Tom Mueller를 찾아갔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Elon Musk는 Tom Mueller에게 이렇게 묻는다. "좀 더 큰 놈도 만들 수 있겠소?" 우주개발의 새로운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Tom Mueller는 자체 로켓 개발에 도전장을 던진 세계 최초의 우주벤처기업 SpaceX의 창업 멤버가 된다. Elon Musk가 처음 Tom Mueller를 찾아갔을 때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던 로켓 엔진은 추진력 6톤짜리였다. 현재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한국형발사체 3단용으로 개발 중인 엔진이 7톤임을 감안하면 개인 취미로 만든 로켓 엔진 치고는 엄청난 수준이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Tom Mueller가 만든 이 엔진은 아마추어가 만든 최고 추력의 로켓 엔진이라고 한다.
이런 Tom Mueller의 열정에 Elon Musk의 파격적인 지원이 더해지면서 로켓 개발 속도는 날개를 달았다. 2002년 6월에 캘리포니아에서 SpaceX가 설립되었는데, 2003년 3월 텍사스 주 맥그리거 시험장에서 최초로 만든 멀린 엔진을 테스트하기 시작하였다. 창립 9개월 만에 소수의 엔지니어들이 모여 신형 로켓 엔진을 설계하고 제작하여 시험에 들어갔으니 이들의 기술적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일에 대한 열정이 정말 놀랍다.
곧이어 팰콘1 로켓 2단에 사용한 케스트렐 엔진도 연달아 시험 했다니 우리나라의 "빨리 빨리"를 무색하게 하는 속도다. 아마, 먹고 자는 시간외에는 일만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006년 초 마침내 팰컨1이 발사됐다. 일반적으로 로켓 개발 초기에는 발사 실패를 겪게 되는 것처럼 SpaceX 역시 첫 번째 발사는 실패였다. 터보펌프의 조그만 알루미늄 너트에서 균열이 발생하면서 폭발한 것이다.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두 번이나 실패의 쓴 맛을 보게 된다.
그리고 2008년 9월, 드디어 네 번째 발사에서 성공을 거둔다. 로켓 개발에 착수한 지 채 6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어느 국가도 이루지 못한 초 단기간의 로켓 개발 성공인 셈이다. 탐 Tom Mueller라는 자기 일에 헌신적이면서 자기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이 없었다면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


대한민국은 자체 개발한 엔진을 기반으로한 우주 발사용 로켓을 개발하고 있다. 현재 개발목표인 KSLV2는아주 초보 스펙을 가진 로켓이다. 추력, 연소실압력, 추력제어기능, 그리고 중요한 무게비추력 등에 있어 낮은 수준이다.
그러나 빠른 시간 내에 KSLV2의 개발을 완료하면서 기술을 익히게 되면, 국가 우주개발 중장기 로드맵에 있는 대로, 이를 기반으로 KSLV3, KSLV4등으로 발전할 경우 미래의 국가 성장동력이 될 수도 있는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KSLV2가 우리의 로켓 개발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하고 이의 발사 성공에만 연연하면서 개발에 임하고 있다면 한국형발사체 사업은 시작부터 대실패이다. 
SpaceX의 Merlin 엔진도 초기에는 연소실 압력도 낮고 추력도 작았으나 몇 번의 발사 실패를 통해 엔진을 개선 하면서 이제는 세계 엔진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엔진이 되었고 가격대 성능비도 최고이게끔 발전했다.
우리도 빠른 시일 내에 KSLV2를 거쳐 국제경쟁력이 있는 로켓으로 커나가야 한다. 실패가 두려워 어물 어물 하다가는 기회는 모두 사라진다. 국민세금을 수조원 낭비하고, 이보더 더 더 중요한, 시간을 놓치는 일이 되지 않게 개발체제의 대변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10.6.18

Oldies but Goodies - Simon and Garfunkel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기획정책 부원장 김승조입니다.

제가 최근에 건조하고 골치 아픈 내용의 이메일을 다수 보낸 죄가 있어 이번에는 주말에 편히 쉬면서 읽을 수 있는 글 하나를 보내 봅니다.


저는 Simon & Garfunkel을 무척 좋아하는데 제 또래뿐만 아니라 한림원 회원들도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에 이 Duo를 간단히 소개하고 들어 보시라고 몇 곡 링크로 보냅니다.

Paul Simon Art Garfunkel은 이름만으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시피 유태계 미국인으로 둘 다 1941New YorkQueens borough에서 태어났습니다. Queens 소재 초등학교에 다니던 둘은 6학년 졸업식에서 연극(아하, 우리도 아는 Alice in Wonderland!)에 같이 출연하였고 13살땐 Simon이 곡을 만들어 Garfunkel과 노래 불러 동네 히트곡이 되었었는데 그 제목이 “The girl for me” 였다나요….. 이 양반들 어린 아이 때부터 참 가당치도 않게 조숙했었나 봅니다!

SimonSinger-Song writer, GarfunkelSinger로 소개되듯이 이들 듀엣의 대부분의 곡과 가사는 Simon이 썼습니다. 저는 역사상 최고의 듀엣으로도 불리는 Simon & Garfunkel이지만 이들의 주인공은 Simon이라 생각합니다. Simon이 그들의 히트한 대부분 곡의 가사를 쓰고 또한 작곡도 했고 기타도 잘 쳐서 Acoustic guitar가 들어가는 곡들은 반주도 직접 했었지요. 세계 최고의 2인 화음을 구사한다는 평을 받았던 Simon & Garfunkel의 화음파트도 주로 Simon이 맡았었고요.   Billboard U.S. singles charts 1위에 오른 3  "The Sound of Silence", "Mrs. Robinson", 그리고 "Bridge Over Troubled Water"들도 당연히 Simon이 작사 작곡했었고 이런 연유로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았었답니다. 70년대 초 대학시절 음악잡지에서 명예영문학박사도 받았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생생한데도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Simon은 수상후보 한번 되기도 힘든 그래미상을 16번이나 받았다 합니다.(Garfunkel 8번의 그래미상, 물론 그룹으로 둘이 함께 탄 것까지 합쳐서) 그리고, 아시지요?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면 해당 곡의 작사, 작곡자에게만 지적재산권(저작권)료로 얼만가 지불된다는데 Simon은 노래방 수입도 상당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이들 같은 오래 전 외국 가수에게도 지불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Simon은 이 때부터 Garfunkel의 타고난 부드러운 미성을 인정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유명 듀엣 “The Everly Brothers” (이분들 또한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유명 듀엣이지요!  “All I Have to Do Is Dream”, “Let It Be Me” 등등)를 우상으로 삼아 모방하여 Tom and Jerry라는 듀엣을 결성하고는 16살에 발매한 “Hey Schoolgirl”(요것들 또 Girl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Pop Charts 49위까지 올라 갔다니 어릴 때부터 엄청난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 법. 더구나 교육열이라면 세계 제일인 유태인 부모님들 아래에서였으니. 그래서 Simon은 뉴욕의 퀸즈 칼리지에서 영문학전공을 하고 한때 법과대학원에도 적을 두었었고 Garfunkel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건축, 역사, 그리고 나중에 대학원은 어울리지 않게(?) 수학을 전공하고.

그러나 Simon의 이 타고난 끼를 어떻게 하겠는가? Simon Simon & Garfunkel을 결성하는 1964년까지 틈틈이 30여곡의 노래를 작사 작곡해 혼자 혹은 Garfunkel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판을 내며 음악을 계속해왔습니다. Garfunkel과 같이 하지 못한 이유는 둘의 성격 차이가 큰 이유였다는데 아마 Simon의 완벽주의자적인 성격도 둘 사이의 걸림돌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Garfunkel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Simon의 완벽주의 성격에 질렸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까요.

1964년 드디어 Simon Garfunkel Columbia Record사와 Simon & Garfunkel라는 듀엣 팀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자기들 성을 그대로 그룹 명으로 쓴 것은 팝 역사상 처음이라는 얘기도 있고요
64 10월엔 Columbia LabelAcoustic guitar반주를 주로 한 포크 송 12곡이 담긴 LP“Wednesday Morning, 3 A.M.”을 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패를 예감하면서 실망한 Simon은 솔로로 뛰기 위해 영국으로 가서 이 술집 저 Pub를 다니며 노래도 하고 판도 내면서 외국 활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Garfunkel은 컬럼비아 대학의 수학교육학과 대학원으로 돌아 가게 되어 Simon & Garfunkel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사실상으로 해체된 거나 다름 없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사이 “Wednesday Morning, 3 A.M.” 앨범의 프로듀서 Tom Wilson의 귀에 미국 동부 쪽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 LP판에 실렸던 “The Sound of Silence”의 신청이 제법 들어 온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Wilson은 단조로운 Acoustic Guitar 반주의 folk 스타일 곡에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의 비트를 얹어 Rock 스타일로 Remix해서 65 9월에 싱글판으로 다시 내놓습니다. 그런데 다시 내놓은 판이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오리지널 판이 나온 지 1년 가까이 지나 본인들도 포기한 상태에서 Simon & Garfunkel과의 일체 상의도 없이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로 새로 낸 싱글이 65 12월에는 드디어 미국 Billboard차트 1위로 올라 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국에서 혹시나 하면서 수시로 팝 차트를 들여다 보던 Simon은 어느 날 자기들 곡이 차트 상위에 랭크 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놀랄 수 밖에!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영국으로 우송된 곡을 들어 보니 자기들이 녹음한 곡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지라 경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

Simon은 즉시 짐을 챙겨 귀국한 후 67 1월에 다시 Garfunkel과 같이 히트한 싱글 곡명과 같은 이름의 “The Sound of Silence”라는 앨범을 내게 됩니다. Cover 곡인 “The Sound of Silence 덕분에 당연히 이 앨범도 상위 차트에 올랐습니다. 같이 실려 있었던 “I am a Rock” Billboard 3위에 까지 오르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그러나 급하게 인기에 편승해 만든 이 앨범은 평론가로부터 좋은 소리 듣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Folk Song이 아니라 급조된 흉내만 낸 Folk라는 비판이 불거졌지요. 실제로 The sound of Silence의 초기 녹음 곡의 경우 둘이 노래 템포를 들쑥날쑥 하게 불러서 나중에 Wilson이 수정 더빙할 땐 도저히 박자를 맞출 수 없어 강한 에코를 넣어 커버했을 정도였었답니다.

단 몇 달 만에 세계적인 인기 가수가 된 Simon & Garfunkel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만회 하기 위해 “The Sound of Silence”의 대 히트로부터 생긴 재정적인 여유를 토대로 시간적인 여유도 최대로 만들어 제대로 된 예술성있는 곡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들은 Simon이 영국 체류 시절에 쓴 Acoustic 취향의 곡들을 위주로 한 포크 팝 곡들을 9개월간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준비를 통해 두 번째 앨범으로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1966)”을 냅니다. Simon의 완벽주의적인 기질 덕분인지 평론가들로부터 그들의 음악이 수준급으로 올라섰다는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상업적으로도 3백만장의 앨범을 판매하게 되면서 미국 레코드협회로부터 소위 Triple Platinum 앨범으로 공인 받습니다. 수록 곡들 중 “Homeward Bound” Top 5에까지 오르게 되고, 영국 민요를 편곡한 Ballad“Scarborough Fair/Canticles”은 비록 차트에는 11위까지 밖엔 못 올랐지만 SimonGarfunkel 두 사람 만들어 내는 완벽한 화음, 손가락으로 튕기는 Acoustic guitar 연주에 차임과 하프시코드 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명곡으로 후반부에는 Canticles이라는 다른 노래를 따라 붙이며 더욱 멋을 부렸습니다.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Garfunkel은 개인적으로 자기들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도 합니다. 


4번째 앨범으로 “Bookends(1968)” 내는데 여기에 히트영화 “The Graduate”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빌보드 차트 1위곡 “Mrs. Robinson”이 수록 되어 있으며 앨범 차트 1위에도 오르고 5백만장 이상의 메가 판매고를 올립니다. 연속 3개의 앨범이 히트를 쳐서 스타덤에 오른 Simon & Garfunkel은 점점 의견 충돌이 잦아지면서 SimonSolo 가수로 나갈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5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며 마지막 앨범이 되는 “Bridge Over Troubled Water(1970)”에는 불후의 명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The Box”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El Condor Pasa” “Cecilia”도 만만치 않은 인기 곡이었으니 앨범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Simon & Garfunkel을 팝 역사상 불후의 레전드로 만들어 주게 됩니다. 이 판은 전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No. 1 앨범으로 기록되고, 전세계적으로 통산 25백만장이 판매되었으며 당시 역대 최고 판매 기록도 세우게 됩니다. 이 기록은 80년대초 Michael Jackson“Thriller”가 나오면서 최고 판매기록을 물려주게 되지요. 그러나, 명성이 높아 가는데 비례해서 두 사람의 의견차는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결국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 서자 마자 Simon & Garfunkel은 해체하게 됩니다. 결국 5-6년간 앨범 딱 5장 내고 헤어진 것입니다. 해체 이후에 콘서트를 위해 잠시 같이 노래한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재결합은 없이 각자 활동했었습니다. 1981년에는 뉴욕 Central Park에서 “The Concert in Central Park” 라는 이름의 무료 Concert를 열어 50만명의 관객을 열광시키면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었지요.
 “Rolling Stones” 잡지의 역대 명곡 500선에서 48위에도 오른 불후의 명곡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 6주간 Billboard 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탑에 올랐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선 중에서는 “Yesterday”, “Let It Be” 다음으로 3위에 랭크 되기도 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처음 작곡할 때부터 Simon은 이 곡은 Garfunkel이 혼자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Garfunkel Simon이 작사 작곡한 작품을 혼자 부를 수는 없다고 우겼으나 결국 혼자서 불렀지요. 사실 Garfunkel의 부드러우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 있는 창법이 빛을 발하는 곡이었습니다. 필요 시에는 고음에서 목청을 바르르 떨기도 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내기에는 화음이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는지 이 명곡에는 Simon의 화음이 전혀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황 콘서트 때에도 Garfunkel 혼자서 부르지요. 처음 작사 작곡 했을 때는 2절 까지만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Garfunkel 2절 만으론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해서 3절을 더 붙였답니다, “Sail on silver girl…… “로 나가는 3절이 실제로도 최고의 감동을 주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래방에서도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창법으로 3절을 시작해 마지막의 웅장한 Full 반주의 영접을 받으면 엄청난 감흥이 옵니다. 1절 초반부분에서는 피아노로 반주를 시작하다가 3절에 와서는 High Low 2대의 베이스 기타가 합류하고 콘서트 홀 효과를 주기 위해서 Echo chamber에서 드럼이 연주 되었으며 Horn 섹센이 곡을 마감하여 마치 오케스트라가 full로 가담하는 듯하게 끝납니다. 3절 첫 부분의 “Sail on sivergirl……”이 구설수에 올랐었습니다. Silvergirl이 속칭 헤로인 마약 주사 바늘을 뜻한다고…… 우리 딸도 대학시절에 한번 이런 주장을 펴서 제가아빠 애창곡을 폄하한다고 화낸 적이 있었는데 실제 당시 미국에서도 제법 논란이 있은 모양입니다. 사실은 Simon이 당시 부인을 대상으로 3절 가사를 썼고 Silvergirl은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부인을 지칭한 것이었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 Simon & Garfunkel의 대표 곡이 되어 Concert때 마다 언제나 이 곡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데 정작 이 곡의 작사 작곡자인 Simon은 무대 뒤 켠에서 바라만 보는 형국이 돼버렸었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Simon저건 내가 만든 나의 곡인데 공연히 Garfunkel에게 부르게 했구나라고 후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주말의 아침을 향기 좋은 커피 한잔과 함께 Simon & Garfunkel의 노래로 1주간의 교육 연구의 피로로부터 해방되시기를 바라면서 아래에 몇 곡의 링크를 보냅니다

즐겨 감상하십시요.


The Sound of Silence( Remixing을 거치지 않은 original Guitar version)
The Boxer
I am a rock
Mrs. Robinson
Scarborough Fair
Bridge over troubled w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