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한림원 기획정책 부원장 김승조입니다.
제가 최근에 건조하고 골치 아픈 내용의 이메일을 다수 보낸 죄가 있어 이번에는 주말에 편히 쉬면서 읽을 수 있는 글 하나를 보내 봅니다.
저는 Simon & Garfunkel을 무척 좋아하는데 제 또래뿐만 아니라 한림원 회원들도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에 이 Duo를 간단히 소개하고 들어 보시라고 몇 곡 링크로 보냅니다.
Paul Simon 과 Art Garfunkel은 이름만으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시피
유태계 미국인으로 둘 다 1941년 New York시 Queens borough에서 태어났습니다. Queens 소재 초등학교에
다니던 둘은 6학년 졸업식에서 연극(아하, 우리도 아는 Alice in Wonderland!)에 같이 출연하였고 13살땐 Simon이 곡을 만들어
Garfunkel과 노래 불러 동네 히트곡이 되었었는데 그 제목이 “The girl for me” 였다나요….. 이 양반들 어린 아이 때부터 참 가당치도 않게 조숙했었나 봅니다!
Simon은
Singer-Song writer, Garfunkel은 Singer로
소개되듯이 이들 듀엣의 대부분의 곡과 가사는 Simon이 썼습니다. 저는
역사상 최고의 듀엣으로도 불리는 Simon & Garfunkel이지만 이들의 주인공은 Simon이라 생각합니다. Simon이 그들의 히트한 대부분 곡의 가사를
쓰고 또한 작곡도 했고 기타도 잘 쳐서 Acoustic guitar가 들어가는 곡들은 반주도 직접 했었지요. 세계 최고의 2인 화음을 구사한다는 평을 받았던 Simon & Garfunkel의 화음파트도 주로 Simon이
맡았었고요. Billboard U.S.
singles charts 1위에 오른 3곡 "The Sound of Silence", "Mrs.
Robinson", 그리고 "Bridge Over Troubled
Water"들도 당연히 Simon이 작사 작곡했었고 이런 연유로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았었답니다. 70년대 초 대학시절 음악잡지에서 명예영문학박사도 받았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생생한데도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Simon은 수상후보 한번 되기도 힘든 그래미상을 16번이나 받았다 합니다.(Garfunkel도 8번의 그래미상, 물론 그룹으로 둘이 함께 탄 것까지 합쳐서) 그리고, 아시지요?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면 해당 곡의 작사, 작곡자에게만 지적재산권(저작권)료로
얼만가 지불된다는데 Simon은 노래방 수입도 상당하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이들 같은 오래 전 외국 가수에게도 지불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Simon은 이 때부터
Garfunkel의 타고난 부드러운 미성을 인정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유명 듀엣 “The Everly Brothers” (이분들 또한 우리 세대가 기억하는 유명 듀엣이지요! “All I Have to Do Is
Dream”, “Let It Be Me” 등등)를 우상으로 삼아 모방하여 Tom and Jerry라는 듀엣을 결성하고는 16살에 발매한 “Hey Schoolgirl”(요것들 또 Girl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은 Pop Charts 49위까지 올라 갔다니 어릴 때부터 엄청난 재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공부를 해야 하는 법. 더구나 교육열이라면 세계 제일인
유태인 부모님들 아래에서였으니. 그래서 Simon은 뉴욕의
퀸즈 칼리지에서 영문학전공을 하고 한때 법과대학원에도 적을 두었었고 Garfunkel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건축, 역사, 그리고 나중에 대학원은 어울리지 않게(?) 수학을 전공하고.
그러나 Simon의 이 타고난 끼를 어떻게 하겠는가? Simon은 Simon & Garfunkel을 결성하는 1964년까지 틈틈이 30여곡의 노래를 작사 작곡해 혼자 혹은 Garfunkel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노래를 부르고 판을 내며 음악을 계속해왔습니다. Garfunkel과 같이 하지 못한 이유는 둘의 성격 차이가 큰 이유였다는데 아마 Simon의 완벽주의자적인 성격도 둘 사이의 걸림돌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Garfunkel이 어느 인터뷰에서도 Simon의 완벽주의 성격에 질렸다고 말한 적이 있으니까요.
1964년 드디어 Simon과 Garfunkel은 Columbia Record사와 Simon & Garfunkel라는
듀엣 팀으로 계약을 맺습니다. 자기들 성을 그대로 그룹 명으로 쓴 것은 팝 역사상 처음이라는 얘기도
있고요
64년 10월엔 Columbia
Label로 Acoustic guitar반주를 주로 한 포크 송 12곡이 담긴 LP판 “Wednesday
Morning, 3 A.M.”을 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패를 예감하면서
실망한 Simon은 솔로로 뛰기 위해 영국으로 가서 이 술집 저 Pub를
다니며 노래도 하고 판도 내면서 외국 활동에 들어가게 됩니다. Garfunkel은 컬럼비아 대학의 수학교육학과
대학원으로 돌아 가게 되어 Simon & Garfunkel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사실상으로 해체된 거나 다름 없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는 사이 “Wednesday
Morning, 3 A.M.” 앨범의 프로듀서 Tom Wilson의 귀에 미국 동부 쪽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 LP판에 실렸던 “The Sound of
Silence”의 신청이 제법 들어 온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Wilson은 단조로운 Acoustic Guitar 반주의 folk 스타일 곡에 전기 기타와
베이스 기타 그리고 드럼의 비트를 얹어 Rock 스타일로 Remix해서 65년 9월에 싱글판으로 다시 내놓습니다. 그런데 다시 내놓은 판이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오리지널 판이 나온 지 1년 가까이 지나 본인들도 포기한 상태에서 Simon & Garfunkel과의 일체 상의도 없이 프로듀서의 아이디어로 새로 낸 싱글이 65년 12월에는 드디어 미국
Billboard차트 1위로 올라 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영국에서 혹시나 하면서 수시로 팝 차트를 들여다 보던 Simon은
어느 날 자기들 곡이 차트 상위에 랭크 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놀랄 수 밖에!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영국으로 우송된 곡을 들어 보니 자기들이 녹음한 곡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지라 경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것….
Simon은 즉시 짐을 챙겨 귀국한 후 67년 1월에 다시 Garfunkel과 같이 히트한 싱글 곡명과 같은 이름의 “The Sound of Silence”라는 앨범을 내게 됩니다. Cover 곡인 “The Sound of Silence 덕분에 당연히 이 앨범도 상위 차트에 올랐습니다. 같이 실려 있었던 “I am a Rock”은 Billboard 3위에 까지 오르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그러나 급하게
인기에 편승해 만든 이 앨범은 평론가로부터 좋은 소리 듣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Folk Song이 아니라 급조된 흉내만 낸 Folk라는 비판이 불거졌지요. 실제로 The sound of Silence의 초기 녹음 곡의 경우
둘이 노래 템포를 들쑥날쑥 하게 불러서 나중에 Wilson이 수정 더빙할 땐 도저히 박자를 맞출 수
없어 강한 에코를 넣어 커버했을 정도였었답니다.
단 몇 달 만에 세계적인 인기 가수가 된 Simon &
Garfunkel은 비평가들의 혹평을 만회 하기 위해 “The Sound
of Silence”의 대 히트로부터 생긴 재정적인 여유를 토대로 시간적인 여유도 최대로 만들어 제대로 된 예술성있는 곡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들은 Simon이 영국 체류 시절에 쓴 Acoustic 취향의 곡들을 위주로 한 포크 팝 곡들을 9개월간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준비를 통해 두 번째 앨범으로 “Parsley, Sage, Rosemary and
Thyme(1966)”을 냅니다. Simon의 완벽주의적인 기질 덕분인지 평론가들로부터
그들의 음악이 수준급으로 올라섰다는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상업적으로도 3백만장의 앨범을 판매하게
되면서 미국 레코드협회로부터 소위 Triple Platinum 앨범으로 공인 받습니다. 수록 곡들 중 “Homeward Bound”는 Top 5에까지 오르게 되고, 영국 민요를 편곡한 Ballad곡 “Scarborough Fair/Canticles”은
비록 차트에는 11위까지 밖엔 못 올랐지만 Simon과 Garfunkel 두 사람 만들어 내는 완벽한 화음, 손가락으로 튕기는 Acoustic guitar 연주에 차임과 하프시코드 음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명곡으로 후반부에는 Canticles이라는 다른 노래를 따라 붙이며 더욱 멋을 부렸습니다. 동양
사람들, 특히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Garfunkel은
개인적으로 자기들 곡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고도 합니다.
4번째 앨범으로 “Bookends(1968)” 내는데 여기에 히트영화 “The Graduate”의 삽입곡으로 유명한 빌보드 차트 1위곡 “Mrs. Robinson”이 수록 되어 있으며 앨범 차트 1위에도 오르고 5백만장 이상의 메가 판매고를 올립니다. 연속 3개의 앨범이 히트를 쳐서 스타덤에 오른 Simon & Garfunkel은 점점 의견 충돌이 잦아지면서 Simon은 Solo 가수로 나갈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5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며 마지막 앨범이 되는 “Bridge Over Troubled Water(1970)”에는 불후의 명곡 “Bridge Over Troubled Water”와 “The Box”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El Condor Pasa” “Cecilia”도 만만치 않은 인기 곡이었으니 앨범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며 Simon & Garfunkel을 팝 역사상 불후의 레전드로 만들어 주게 됩니다. 이 판은 전세계 대부분 국가에서 No. 1 앨범으로 기록되고, 전세계적으로 통산 25백만장이 판매되었으며 당시 역대 최고 판매 기록도 세우게 됩니다. 이 기록은 80년대초 Michael Jackson의 “Thriller”가 나오면서 최고 판매기록을 물려주게 되지요. 그러나, 명성이 높아 가는데 비례해서 두 사람의 의견차는 극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되어 결국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 서자 마자 Simon & Garfunkel은 해체하게 됩니다. 결국 5-6년간 앨범 딱 5장 내고 헤어진 것입니다. 해체 이후에 콘서트를 위해 잠시 같이 노래한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재결합은 없이 각자 활동했었습니다. 1981년에는 뉴욕 Central Park에서 “The Concert in Central Park” 라는 이름의 무료 Concert를 열어 50만명의 관객을 열광시키면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었지요.
“Rolling
Stones” 잡지의 역대 명곡 500선에서 48위에도 오른 불후의 명곡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6주간 Billboard 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탑에 올랐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해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선 중에서는 “Yesterday”, “Let It Be” 다음으로 3위에 랭크 되기도 했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처음 작곡할 때부터 Simon은 이 곡은 Garfunkel이 혼자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Garfunkel은 Simon이 작사 작곡한 작품을 혼자 부를 수는 없다고 우겼으나 결국 혼자서 불렀지요. 사실 Garfunkel의 부드러우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 있는 창법이 빛을 발하는 곡이었습니다. 필요 시에는 고음에서 목청을 바르르 떨기도 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내기에는 화음이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는지 이 명곡에는 Simon의 화음이 전혀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황 콘서트 때에도 Garfunkel 혼자서 부르지요. 처음 작사 작곡 했을 때는 2절 까지만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Garfunkel이 2절 만으론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해서 3절을 더 붙였답니다, “Sail on silver girl…… “로 나가는 3절이 실제로도 최고의 감동을 주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래방에서도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창법으로 3절을 시작해 마지막의 웅장한 Full 반주의 영접을 받으면 엄청난 감흥이 옵니다. 1절 초반부분에서는 피아노로 반주를 시작하다가 3절에 와서는 High와 Low 2대의 베이스 기타가 합류하고 콘서트 홀 효과를 주기 위해서 Echo chamber에서 드럼이 연주 되었으며 Horn 섹센이 곡을 마감하여 마치 오케스트라가 full로 가담하는 듯하게 끝납니다. 3절 첫 부분의 “Sail on sivergirl……”이 구설수에 올랐었습니다. Silvergirl이 속칭 헤로인 마약 주사 바늘을 뜻한다고…… 우리 딸도 대학시절에 한번 이런 주장을 펴서 제가 “아빠 애창곡을 폄하한다”고 화낸 적이 있었는데 실제 당시 미국에서도 제법 논란이 있은 모양입니다. 사실은 Simon이 당시 부인을 대상으로 3절 가사를 썼고 Silvergirl은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부인을 지칭한 것이었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처음 작곡할 때부터 Simon은 이 곡은 Garfunkel이 혼자 부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Garfunkel은 Simon이 작사 작곡한 작품을 혼자 부를 수는 없다고 우겼으나 결국 혼자서 불렀지요. 사실 Garfunkel의 부드러우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호소력 있는 창법이 빛을 발하는 곡이었습니다. 필요 시에는 고음에서 목청을 바르르 떨기도 하고! 애절한 분위기를 내기에는 화음이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는지 이 명곡에는 Simon의 화음이 전혀 가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황 콘서트 때에도 Garfunkel 혼자서 부르지요. 처음 작사 작곡 했을 때는 2절 까지만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Garfunkel이 2절 만으론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해서 3절을 더 붙였답니다, “Sail on silver girl…… “로 나가는 3절이 실제로도 최고의 감동을 주는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래방에서도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창법으로 3절을 시작해 마지막의 웅장한 Full 반주의 영접을 받으면 엄청난 감흥이 옵니다. 1절 초반부분에서는 피아노로 반주를 시작하다가 3절에 와서는 High와 Low 2대의 베이스 기타가 합류하고 콘서트 홀 효과를 주기 위해서 Echo chamber에서 드럼이 연주 되었으며 Horn 섹센이 곡을 마감하여 마치 오케스트라가 full로 가담하는 듯하게 끝납니다. 3절 첫 부분의 “Sail on sivergirl……”이 구설수에 올랐었습니다. Silvergirl이 속칭 헤로인 마약 주사 바늘을 뜻한다고…… 우리 딸도 대학시절에 한번 이런 주장을 펴서 제가 “아빠 애창곡을 폄하한다”고 화낸 적이 있었는데 실제 당시 미국에서도 제법 논란이 있은 모양입니다. 사실은 Simon이 당시 부인을 대상으로 3절 가사를 썼고 Silvergirl은 흰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부인을 지칭한 것이었답니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Simon &
Garfunkel의 대표 곡이 되어 Concert때 마다 언제나 이 곡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데
정작 이 곡의 작사 작곡자인 Simon은 무대 뒤 켠에서 바라만 보는 형국이 돼버렸었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Simon이 “저건 내가 만든 나의 곡인데 공연히 Garfunkel에게 부르게
했구나”라고 후회하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주말의 아침을 향기 좋은 커피 한잔과 함께 Simon
& Garfunkel의 노래로 1주간의 교육 연구의 피로로부터 해방되시기를 바라면서
아래에 몇 곡의 링크를 보냅니다.
즐겨 감상하십시요.
즐겨 감상하십시요.
The Sound of Silence( Remixing을 거치지 않은 original Guitar version)
The Boxer
I am a rock
Mrs. Robinson
Scarborough Fair
Bridge over troubled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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